캐나다 건국 150주년 기념 로고 공모전에서 당선된 아리아나 쿠빈의 작업.
캐나다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춥다(정말 춥다), 눈(한겨울에는 산더미처럼 쌓인다), 메이플 시럽(지역 특산물로 일본에 우동이 있다면 캐나다에는 메이플 시럽이 있다), 단풍잎(국가 상징물인 만큼 개량 버전이 야구팀, 항공사, 150주년 건국 기념 로고 등 수없이 많다), 하키(종교에 가깝다),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한 자연 풍경… 애석하게도 디자인은 저만치에 있다. 그러나 한 꺼풀 들춰내면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가장 핫한 국가 수석 저스틴 트루도와 그의 난민 수용 정책, 과학기술 및 매체 미래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셜 매클루언, 명성이 앞서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 팝 가수 드레이크(Drake), 심지어 요즘 가장 핫한 히어로인 엑스맨의 울버린까지, 창의적인 활동을 펼치기에 캐나다의 토양은 풍요롭다. 필자가 거주하는 토론토에서 건축계의 록 스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ebeskind)와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건축물을 볼 수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더 깊이 파헤쳐보면 단풍국이 디자인에 수십 년간 미친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선 캐나다 국기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닛쇼키에 버금가는 강렬한 국가 상징물로 단풍잎을 간결하게 시각화한 것도 압도적이지만 국기의 1:2:1 컬러 및 공간 배분도 지극히 디자인적이라 할 수 있다. 의외지만 1967년에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조지 스탠리에게 디자인 공로가 있다. 그에 더해 여느 그래픽 디자인 역사책에 등장하는 캐나다 철도청 로고 CN, 1976년 몬트리올 하계올림픽 브랜딩, 캐나다 국립 방송사 CBC 외에 RBC 은행 로고 등 디자인 유산에 가까운 작업이 적지 않다. 카림 라시드(Karim Rashid), 디자인 연구가 브루스 마오(Bruce Mau), 공예에 가까운 시각 디자인 작업을 하는 마리언 반티예스(Marian Bantjes)도 모두 캐나다 출신 디자이너다. ‘어?’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캐나다 디자인은 의외로 여기저기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 캐나다의 디자인 뮤지엄 디자인 엑스체인지(Design Exchange, 이하 DX)에서 [노던 터치Northern Touc]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캐나다 디자인 발굴 성격을 띤 전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 대륙이 급속하게 성장한 때부터 지금까지 캐나다가 디자인 풍토에 남긴 유산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후 미국의 무한 질주 발전에 얹혀 함께 급속도로 성장한 캐나다는 어쩌면 미국이라는 등잔 바로 밑에 있었던 결과 디자인 강국으로 각광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보온병 회사 써머스(Thermos)의 최초 투 컬러 플라스틱 보온병,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기용 자전거 제조사 세벨로(Cervelo)의 탄소 보디, 플라스틱 바가지의 원형 격인 움브라(Umbra)의 가비노(Garbino) 그리고 트위터 창립자인 잭 도시(Jack Dorsey)에게 영감을 준 블랙베리 850 휴대폰 단말기 모두 캐나다 디자인의 산물이다. [노던 터치] 이외에도 DX에서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는 사업이 있다. 아카이브와 수집을 목적으로 캐나다 디자인 유산을 모으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현재는 가구에만 집중하고 있는, 이제 막 시작한 사업이지만 곧 디자인의 다른 영역으로 펼쳐나갈 계획이다. 요즘 저자세로 돌입한 미국보다 캐나다가 더 국제 무대에서 조명을 받고 있는 만큼 이곳 디자인도 다시금 거론할 때가 온 것이다. 더욱이 올해는 건국 150주년으로 여러모로 새로운 전환기로 적합한 시기다.

같은 맥락에서 서부 해안 밴쿠버에서 캐나다 그래픽 디자인을 정리하려는 이들도 있다. 책이나 전시가 아닌 다큐멘터리로 캐나다 그래픽 디자인 역사를 정리하고 앞에서 언급한 유명한 로고의 창작자들을 인터뷰하여 유산으로 남기고자 킥스타터 크라운드 펀딩에 도전했다. 얼마 전 SNS에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 이들은 올해 초 후원 모금에 성공하여 9월에 다큐멘터리를 공개하기로 했으나 개봉은 내년 봄으로 미뤄졌다. 지난 18년 동안 그래픽 디자인 등재 협회(Registered Graphic Designers)에서 주최하는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콘퍼런스 ‘디자인 싱커(Design Thinkers)’도 있다. 매년 봄과 가을 동과 서, 그러니까 밴쿠버와 토론토에서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모여 업계 소식과 최근 동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로 11월 7~8일 토론토에서 동부 콘퍼런스가 열렸다. 직접 참석한 소감을 말하자면 여느 디자인 콘퍼런스처럼 난해하기 짝이 없는 주제와 너무나도 많은 라인업으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작년 서울에서 개최된 AGI처럼 누구를 위한 디자인 콘퍼런스인지 모르겠으나 입장료는 거하게 받고 모여서 수다만 떨다 가는, 결국 남는 게 없는 점은 여기도 똑같다. 참고로 내년 5월에 밴쿠버에서 또 모인다. 그러고 보니 국내처럼 이곳 캐나다도 디자인 협회가 참 많다. 방금 언급한 등재 협회(실제로 회원 등재를 위해 시험도 보고, 포트폴리오 심사와 면접을 한다) 외에도 캐나다 그래픽 디자이너 협회(Graphic Designers of Canada, GDC), 캐나다 광고 디자인 클럽(Advertising & Design Club of Canada, ADCC) 국제 디자인 기구(World Design Organization, WDO), 캐나다 산업 디자인 협회(Association of Canadian Industrial Designers, ACID) 등 디자인 관련 종사자 대비 협회가 많아도 너무 많다.

한편 지난 9월 28일부터 10월 8일까지 토론토 폐공장에서는 EDIT(Expo for Design Innovation & Technology) 행사가 열렸다. 미래를 예측하고 어떻게 하면 현재 우리 인간이 더욱 풍요롭고 긍정적인 내일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심포지엄, 전시, 워크숍 등을 진행하며 함께 고민하는 열흘간의 디자인 꿈동산이었다. 캐나다 디자인 뮤지엄 DX에서 주최하고 유엔 외 수많은 단체와 정부 기관으로부터 후원받은 이 야심 찬 디자인 페스티벌은 글로벌 식량난과 기근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귀뚜라미와 폐식량), 박스로 배달되거나 앱으로 기를 수 있는 유기농 농작물, 자가발전 난민 수용 시설을 소개했다. 이 외에도 해양 폐기물을 수거 및 해결하려는 네덜란드의 청년 발명가 보이안 슬랏(Boyan Slat)의 [오션 클린업Ocean Cleanup] 전시와 디자인 연구가 브루스 마우의 거시적인 문제 해결 전시가 열리는 등 현란한 행사임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토록 많은 디자이너, 엔지니어, 사상가, 발명가가 지구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려 발벗고 나서는데 인류는 여전히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아이러니함을 느꼈다. 간혹 문제 해결보다 ‘으샤~’ 같은 궐기에 더 집중해 실제 이슈를 와전하거나 해결된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돌아서면 바뀐 게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행사장이었던 폐공장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드는 느낌이 딱 그랬다. 올해 처음 시작한 EDIT는 해마다 개최할 예정으로 그들이 외치는 것처럼 “미래가 끝내준다(The Future is Awesome)”는 구호가 현실이 되는 데 기여하는 행사가 됐으면 좋겠다는 사견도 있다.

이렇듯 디자인과 캐나다는 사뭇 괴리가 있어 보인다. 올해 건국 150주년을 맞은 캐나다가 그 괴리를 좁히는 데 더욱 매진할 필요가 있다. 일례로 150주년 기념 로고와 관련된 이슈를 들 수 있다. 캐나다는 건국 기념 로고 디자인을 공모, 워털루 대학교 디자인 전공생 아리아나 쿠빈(Ariana Cuvin)의 출품작이 당선되어 현재 여기저기에서 알록달록한 단풍잎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디자인 공모가 학생들에게만 국한되었다는 것이다. 즉 전문 그래픽 디자이너가 참여할 수 없어 반발이 심했다. 우선 아리아나 쿠빈의 로고에 대한 맹비난이 있었고, 국가 차원에서 이토록 중요한 상징물을 정하는 데 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준 것도 부당하다는 것이 대략적인 비판의 요지였다. 이에 캐나다 전역의 ‘전문’ 디자이너들은 아리아나의 로고를 대신할 자신들의 작업을 모아 선보이는 사이트(the150logo.ca)를 개설하는 등 디자이너들만의 방법으로 항의의 메시지를 띄웠다(사이트를 방문해보도록 권한다). 이처럼 거론되는 디자인 이슈들은 어쩌면 캐나다 디자인의 현주소를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위 전문 디자이너들이 대안으로 내세운 로고들이(사이트에서는 ‘굿 디자인’으로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다) 현재 사용하는 아마추어인 아리아나의 로고보다 더 낫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더 못하다. 판에 박힌, 으레 생각할 수 있는 레드와 화이트의 수많은 조합, 그놈의 단풍잎과 150이라는 숫자가 고작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소위 굿 디자인이라면 캐나다의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다행히 채택된 로고는 ‘굿 디자인’이 아니었고 오히려 미래와 앞날을 내다본 ‘가능성’에 더 집중한 장고의 선책이었다. 이것이 바로 캐나다 디자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싶다. 미국이나 유럽의 몇몇 나라처럼 이미 이슈가 된 디자인에 연연하거나 뒤따르지 않고 그들만의 독창적인 디자인에 집중할 때인 것이다. 이미 지나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캐나다 디자인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억지로 영웅시하고 [노던 터치>처럼 캐나다 디자인을 쥐어짜내듯 전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이곳 캐나다는 비록 지형은 척박하지만 디자인과 기타 창의적인 사업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은 풍요롭다. 과거에 집중하거나 트렌드를 좇느니 오히려 EDIT처럼 조금은 허황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기후변화, 기근, 난민 등 전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지금 이곳에서 해결해보자는 포부를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다.